본문 바로가기
시간 기록장

23.09.11

by 준준xy 2023. 9. 11.

언젠가 식사를 마치고 벚꽃이 핀 교정을 걸으며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은 이 길을 걸으면 어떠한 감정이 드시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 변함없이 피고 지는 길 위에서 선생님은 그런 감정?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 하신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20대에 가장 많이 오고 가며 걸었던 그 길 위에서 계절에 따라 수많은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봄에는 흩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답기도, 아프기도 하였고,
초록빛을 간직하는 여름은 시원하였다.
또 선선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은 쓸쓸하다가,
텅 빈 겨울에는 지난가을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추억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낯선 노르웨이라는 나라에 살게 되면서,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조용한 공간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기만의 상상이나 소용돌이 속에 빠지기 쉬웠고,
휩쓸려 지나간 자리에 남은 반듯한 구멍은 속을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스트리밍 구독도 끊고, 즐겨 듣던 아이유의 노래도 뒤로한 채, 가사가 없는 재즈나 딱딱한 뉴스를 듣게 되었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창밖의 소란을 가둔 채 비운다.

스물셋의 나는, 10년 후의 시간을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떠나가는 소중한 것들을 보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도망치며 나아간 그 발걸음이 닿은 그곳에 진정한 행복은 없다 이야기해 주고 싶다.

'시간 기록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11.13  (2) 2023.11.13
23.10.07  (0) 2023.10.15
23.08.13  (0) 2023.08.14
선배 행복해요?  (0) 2023.07.24
무제  (0) 2023.07.13